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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산업행정뉴스=김국우논설위원] 3·1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자주독립을 선언한 만세혁명이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 올해로 106주년을 맞는 삼일혁명절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국으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날에 3·1혁명의 의미와 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3.1절의 새 명칭 ‘3.1혁명절’을 제안하는 책 ‘새로 쓰는 3·1혁명 100년사’가 출간 된 바 있다. 신문기자클럽과 사단법인 삼일독립운동 100주년기념사업회가 2년에 걸쳐 준비하고 기획해 2019년도에 세상에 알린 역작이다.
이 책은 3·1운동을 ‘혁명’으로 표기한 역사서이자 3·1운동을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근대사가 없다는 우리 역사를 인문학의 거울에 비춰 역사를 문화,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제적으로 접목했다.
저자는 3.1운동 명칭은 ‘3.1혁명’이며 3.1절도 ‘3.1혁명절’로 바꿔야 한다며, 그 이유로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신해혁명처럼 권력의 주체가 일반 백성, 민중으로 넘어오는 세계사적 민주혁명임을 강조 한다.
또 3.1운동 명칭은 일제가 ‘3·1대혁명’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했다며, 우리 민족의 혁명적 거사를 단순한 계몽운동 정도로 평가절하 한 것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역동적 다이내미즘(dynamism)의 기원은 3·1혁명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며, 최근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예를 든다.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 자부심의 원천이자 인적 자원이다. 대한민국은 22세기를 지배할 ‘태양의 제국’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탑골공원은 1902년 고종 즉위 40년 기념행사를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진두지휘해 만든 최초 근대식 공원이다. 또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십층석탑이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한다.
또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수양인 정재용 애국학생이 106년 전,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됐다는 점이다.
팔각정은 탑골공원 누정(누각과 정자)으로 1989년 9월 19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목청껏 독립을 외치던 이곳은 106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함성과 체취가 살아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듯하다.
3·1만세운동은 단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져 3월 한 달과 4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도시와 농어촌과 산간벽지와 장터, 그리고 섬마을에 걸쳐 불꽃같은 열정을 분출했다. 세계사적 전대미문의 기적에 감격할 뿐이다. 국내외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힘을 한데 모았다.
당시 기마부대와 일경이 발포하고 총칼을 휘두르며 잔혹한 진압은 분노를 자아낸다. 주동자들에게 보복과 고문, 폭행은 가히 야만의 경지에 이르렀었다.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한국민중이 입은 피해 상황은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회집회수 1,542건에 동원인원 2,023,098명이었다. 사망자 7,609명, 부상자 15,961명, 피검자 46,948명이었다.
사적 제32호인 독립문과 함께 일제강점기와 독재정부 시절 많은 우국지사들이 고초를 겪었던 역사의 공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배경해서 전 세계인에게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 3.1만세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가(家) 집, 딜쿠샤를 기억한다.
이곳은 미국 AP통신(Associated Press) 특파원으로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앨버트 W. 테일러(미국인) 부부가 종로구 행촌동에 짓고 살았던 벽돌 2층 저택이다. 결국 일제에 의해 추방돼 돌아오지 못했고 집은 황폐화됐다. 서울시는 이 집의 옛 모습을 복원해서 그 유래와 감동 일화를 밝혀냈다.
작성한 기사와 선언문을 품고 동생 윌리엄 테일러가 AP통신 도쿄 지사에서 타전한 기사는, 통신사 배포망을 통해 세계 최고 언론인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인류애와 독립정신에 기초한 3.1독립선언서는 세계인들을 감동시켰고, 약소국 한국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냈다. 그 당시 기사에 이렇게 타이틀을 내보냈다.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Koreans Declare For Independence).”
한국민의 거족적인 3·1운동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동정적이었다. 또한 만세운동에 대한 평가보다도 일제의 야만성을 규탄했던 것이다.
특히, 영국인 스코필드(Schofield, F. W.)에 의해 보도된 제암리 만행이 세계인을 경악시켜 일본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더욱 높아지게 된 점이다.
만세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자주에 있었다.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일제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바꿨다. 또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으로 교육진흥과 문예운동 활성화로 민족자립 기초와 자주독립사상 이었다.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 에서 천명한 자유평등사상·민주주의사상, 애국·애족 · 인도주의를 곁들인 신사상이 출현했다. 경제사적으로는 민족기업의 건설 운동으로까지 전국적인 확대로 한국경제사의 내재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올해는 광복80주년의 뜻 깊은 해이며, 3월 1일은 제106주년 3·1혁명절이다.
우리 모두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다는 데서부터 동참해 갑시다.
삼일절 제106주년 1,000만명 태극기 집회로 체제 전쟁과 이념 대결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을 새롭게 자유 통일 체제로 대개조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때이다.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태극기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행사로 승화하는 날이 되길 이 삼일혁명절 날에 희망적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