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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만주항일독립투쟁의 영웅 김좌진 장군

4차산업행정뉴스 기자 입력 2021.10.11 09:03 수정 2021.10.11 09:11

-새로 쓰는 ‘3.1혁명 100년사’의 저자 김국우의 독립운동가 칼럼 연재

 

                             김국우 4차산업행정뉴스 논설위원

 

[4차산업행정뉴스=4차산업행정뉴스기자]  지난 20세기 초 우리 민족은 냉엄함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 잃은 민족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국권 회복의 희망과 의지를 굳게 다지며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투쟁을 전개해 마침내 조국광복을 이뤄낸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만든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근대사 연구가 제대로 되려면 독립운동가들의 연구부터 선행돼야 한다고 절감하게 된다.

감히 이 글을 통하여 백야의 애국정신을 제대로 이해되고, 고매한 삶을 되새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일제 식민지의 시대적 배경
한일합병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을사5조약은 황제 승인과 서명이 없었고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후에 일제 통감과 통감부가 행한 모든 정책과 조약은 모두 그 효력상실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 조약은 한국 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의사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 무력 하에서 강압적으로 체결됐기 때문이다. 이를 일제병탄(日帝倂呑), 경술국치(庚戌國恥),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본격화됐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그 해 8월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차례로 체결하여 본격적인 식민지화 조치를 단계적으로 면밀히 주도했다.

 
1910년 5월 30일 일본 육군대신데라우치(寺內正穀)가 3대 통감(統監)에 취임하면서 급속도로 추진했다. 데라우치는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합병조약에 조인하고 이를 8월 29일 발표한다.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고,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에 부임했다. 조선왕조는 건국 27대 519년(대한제국 성립 18년)만에, 합병의 형식으로 일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백야 김좌진 장군 -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신화
◇백야 김좌진, 청산리 대첩을 이끈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충남 홍성군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 유적지.김좌진(金佐鎭, 1989-1930)은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화이다.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의 정치인이었다. 또한 시인, 저술가, 문장가였다.

 
김좌진은 김종진(1901-1931, 신민부의 군정파)과 함께 북만주 지역에서 한국적 아나키즘을 통해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대표적 인물이다. 철학적 이념은 대동 사회의 구현이며, 자유 평화를 지향한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며 이름을 떨쳤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중국 만저우 지린성에서 42세 나이에 암살. 순국했다.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서다”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민족 운동가이자 교육가, 항일혁명가였던 김좌진을 조명한 책이다. '조국의 독립'을 가장 큰 가치로 세우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민족'을 우선시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김좌진의 생을 되돌아보게 한다.김좌진은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 현장의 중심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어 상해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만주를 고집했다. 조국의 독립은 독립군 양성을 토대로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격할 수 있는 최적지를 만주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항상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것도 같은 이유다. 때론 무장투쟁론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한군정서가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을 때, 총재 서일은 ‘아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며, 북만 오지(奧地)로 이동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좌진은 독립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사령부를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에 의해 신민부 간부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군정파’를 이끌었다. 북만주지역에 공산주의세력이 확대되면서 동포들이 신민부에서 이탈할 때도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독립군 양성 ,군비확충, 국내진격작전 등을 추진했던 무장독립투쟁가였다.

-김좌진 장군의 항일투쟁 생애 요약

1) 출생과 성장
1889년 12월 16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했다. 만 세 살 때 부친 김형규를 잃었다.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본관은 신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1906년)에 그는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미래의 선각자였다.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한제국 교육 사회사업 르네상스 혁신 선구자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대한독립군 참장(參將, 현재의 육군 소장에 해당)으로 전역했고, 서훈은 대한민국 건국훈장 제1급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2) 가족관계
부인도 여럿이고 축첩도 해서 후손이 많다. 주먹 출신 국회의원 김두한은 서자다.(모친은 일명 박계숙인 김계월) 그의 딸인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19대) 김을동에게는 조부가 되며, 배우 송일국은 김두한의 외손자이다. 김옥균은 9촌 숙부이며, 김종진은 족제이다. 자녀는 2남 2녀이며, 형제로 3남 1녀가 있다.

3) 애국의 길을 선택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했으며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한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또 청년학우회도 설립했다.

4) 항일투쟁의 길을 가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조달 마련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았다 검거돼,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는데 이때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출소해 쓴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시가 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라는 시도 썼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을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이 됐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그는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왔기 때문에 자유시참변은 겪지 않았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했다. 정예사관 양성을 위해 성동사관학교를 세웠다.

-백야의 순국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한다. 1929년 임정내무부 조선한민족총연합회 총재가 됐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되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김일성(金一星, 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朴尙實, 일명 : 尙範, 金信俊)에게 피살되었다. 나이 42세였다.

-김좌진 장군과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

1) 항일무장투쟁 3대 명장, 백야와 김동삼 오동진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맹장은 김동삼, 김좌진, 오동진 장군이다.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은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 참모장, 대한통의부 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원명은 김긍식(金肯植), 경북안동 출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삼원보에서 이상룡·이시영·이동녕·윤기섭·김창환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를 조직, 재만동포의 농지개혁과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에 힘썼다.

무장독립운동을 위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1920년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제2의 군사기지를 구축하였다.

1922년 연해주 각 단체를 통합해 대한통의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피선됐다.

1928년12월 혁신의회 의장,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유일당을 결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37년 3월 3일 순국했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나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2) 송암 오동진
송암 오동진은 백야와 같이 1962년 독립유공자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오 장군은 통의부가 창립된 1922년부터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이었다.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 인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실제로 일제 식민당국은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현상금 10만 원을 내걸 정도였다. 

 

당시 10만 원이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13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현상금인 셈이다.1919년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평안북도 삭주군에 민족학교 '배달 의숙'을 설립했고, '대한 광복군 총영' 결사대로 안경신 의사와 함께 일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들어 오 장군은 민족유일당 운동 차원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고려혁명당'을 건설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투쟁했다. 북쪽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오동진 장군의 묘가 조성돼 있어서 양세봉, 최동오, 류동열과 함께 남과 북 모두에서 항일 독립투사로 인정받는다. 오동진은 김좌진처럼 아나키스트도 아니며, 코뮤니스트도 아닌 공화 민족주의자이다. 

3) 독립운동가 삼백(三白) 안희제
독립운동가 삼백(三白)이란?
백범(白凡) 김구 주석 대한민국장 (1962)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 대한민국장 (1962) 청산리대첩 영웅
백산(白山) 안희제 사장 독립장 (1962) 임오순국 10현. 독립운동 자금조달
(백암(白巖) 박은식을 넣기도 한다)

 
안희제(安熙濟, 1885-1943))는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출신의 거부였다. 생가는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와 지척이다. 그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무역상이 되었고, 번 돈은 상해로 보내져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다. 임정 자금책이었던 그는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변장술에 능했다. 금테 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다녔으며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여관에 투숙했다.

 
(1975, 나라사랑19집―안희제 특집호)백산은 1907년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 교육운동을 펼쳤다. 1909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기도 했다.1939년 김구 주석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임정첩보 36호 요원 김형극은 “김 주석은 자금조달이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백산을 어버이처럼 믿고 만나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고 밝혔다.(김형극.‘나라사랑’ 19집기고)대종교에 입교한 백산은 일제가 1942년 대종교 간부 체포령 때, 혹독한 고문을 받고 1943년 8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5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백범 김구 주석
김좌진 장군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1937년 봄에 직접 만주 해림으로 잠입해 백골을 수습한 후 가명으로 밀장 됐다가 충남 보령시의 선산에 아들 김두한에 의해 부부 합장됐다. 1947년 서울에서 정식으로 장례식을 가졌다.

김구는 1947년 백야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그는 추도사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름만 듣던 청년 김좌진을 만났소.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해 봅시다.”라고 하면서, 추도사를 읽으면서 팔십의 나이도 잊은 채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출처 : 도진순《백범어록》, 돌베개, 2007년 11월 12일 

-홍범도 장군 백산 안희제 일송 김동산 송암 오동진
5) 백야 김좌진과 홍범도의 운명적 인연
백야와 홍범도는 모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인생의 후반부에 이념이 대립하던 시대의 풍파 속에서 두 사람이 나아간 행보도 서로 달랐다. 그러나 그 목적은 똑같은 조국의 독립이었다는 평가다. 홍범도의 독립군은 소련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무장 해제되는 배신의 아픔을 겪었다.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76세에 사망했다. 백야는 청산리대첩 이후 소만(蘇滿)국경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태반의 부하를 잃는다. 홍범도를 포함한 한인 공산주의자와 소련군 배신 때문이었다.

 
5. 김좌진과 대종교
임시정부 공식 군사기관인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를 비롯, 총사령관 김좌진과 연성대장 이범석, 북로군정서와 함께 1920년 10월 일본군에게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을 거둔 대한독립군 지도자 홍범도 역시 대종교 신도였다. 이는 독립운동사 주역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기도 하다. 백야는 유교(성리학)에서 개종한 것이다. 대종교를 부활시킨 스승 홍암 나철 대의를 꾸준하게 따랐다.

나철은 단군교를 ‘중광’했다. 당대 최고의 정치적 거목 김윤식(1835∼1922)의 제자이자 유학자로서 을사오적 처단과 대일 외교 등을 주도한 인물이다. 역대 대종사인 홍암 나철,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 등이 중심축이었다. 1942년 11월 임오년에 일어난 일제의 대종교 박해사건(임오교변 敎變)으로 순국한 10명의 간부를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 부른다.

 
올해는 한일병탄 111주년을 맞는다. 또한 청산리대첩 101주년이자 김좌진 장군께서 우리 곁을 떠난 지 91년이나 된다.


‘역사는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역사적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3.1독립정신을 현대사와 관통하여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재조명함은 우리의 역사적 책무이자 후손들의 몫이다. 이글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나라 사랑하는 애국심을 생생하게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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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국우(金國祐) 주요 약력
현재 월간희망제주 편집발행인(16년째), (사)삼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사)3.1정신보국운동연합회 서울회장, 한국정치문화연구원장, 무궁화연구원장,
서울경기행정신문 논설고문 등을 맡고 있다.
제주도 涯月출신. 경주김씨(益和君波). 경제학,경영학,행정학,인문학,영어영문학 등 전공학습. 통섭적 학제간(inter-disciplinary)연구가. 조지소로스의 ‘금융의 연금술’ 번역 등 30권 저서출간. 경제.금융 칼럼(조선,서울,매경,한경 등 15년)
금융인(30년) 출신. 제일은행 외국영업부를 거쳐 대우그룹(대우증권) 공채 1기로 명동지점장, 채권부장, 자산관리위원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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