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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제77주년 제주4·3추념 일엔 대한민국 현대사를 제대로 인식해야

김국우 기자 입력 2025.03.31 13:01 수정 2025.03.31 13:17

 

 

                   제66주년 4.3희생자 추념식 제주4.3평화공원 /자료사진

[4차산업행정뉴스=김국우논설위원]  제주4.3평화 기념관 어두운 동굴 끝에 하얀 비석 ‘백비’가 누워 있다.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설명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4·3 백비, 이름 짓지 못한 역사’라고

아이유 박보검 주연의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이 제주바다와 해녀지만, 고통과 상처의 4·3 흔적은 없다. 두 주연배우의 시공은 현대사 쪽이고 부모 세대의 4·3은 과거사로 구분된 이유다.

 
반세기가 넘도록 4·3은 무조건적 ‘속숨허라’고 금기된 강요의 침묵이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에서 열린 3·1절 28돌 기념집회에 서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 민간인 6명이 희생한 것이 직접적 원인이 됐다.

1948년 4월 3일 경찰의 탄압에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로 확대됐다. 미군정은 제9연대를 진압에 투입, 제주에는 피바람이 일었다. 당시 검찰과 사법부는 제주4·3의 원인을 남한 단독선거 반대, 관공리 부패, 경찰과 우익 청년 단원의 가혹한 행위 등을 들었다. 제주 특유의 '괸당' 문화로 끈끈한 제주사회의 특별함이 제주를 역사의 중심으로 내 몰게 한 주요 이유로 꼽기도 한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7년 7개월의 인고의 세월이었다.

 

제주인들은 평생 영산한라산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1948년 겨울, 한라산엔 많은 눈이 내렸다. 삼촌들은 눈 덮인 동굴과 골짜기에서 토벌대를 피해 살았다.

 

제주4·3사건은 단순한 이념갈등만은 아니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행정에 끌어들여 우를 범했고, 식량정책의 실패, 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등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됐다. 

 

많은 마을들이 불 태워져 사라졌고, 주민들은 이산가족이 되거나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연좌제의 굴레로 내몰려 죽거나 외면됐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울음조차 말라 버렸다. 두려움과 공포로 살아남아야 했다.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수형인들은, 시신도 찾을 수 없다. 표석의 숫자만 4천기에 가깝다. 미국을 빼놓고는 4·3을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이 무장봉기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규정, 강경 진압 일변도 선택이었다. 

 

특히 1948년 11월 17일 계엄 선포와 함께 시작된 ‘초토화 작전’이란 대학살이 전개된다. 해안선에서 5km 이내의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강제이주 당했으며, 많은 민간인들이 무장대에 협조한 혐의로 처형됐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이나 평화는 존재조차 없었다. 희생자와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 그들에겐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4·3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선 당시 국제적 냉전 체제와 남북 분단의 산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린 제주와 대한민국이 어떤 위치였는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일제식민지의 해방을 기대했지만, 힘없는 우리는 승전국의 사냥터에서 희생물로 전락했다. 4·3은 20세기 전쟁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명이 희생된 국가폭력 사건이다,

이를 외면한 채 우리 현대사를 논할 수 있을까. 제주4·3은 3만명이 죽은 한 사건이 아니다. 소중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희생당한 3만 건의 사건. 우리 부모 삼촌 임산부 철모른 아이들이 죽어나갔다. (삼촌은 윗어른의 존칭)

 
제주4·3 제77주년 추념일엔 3만 명의 원혼을 참배하고 유족을 위무하며 질곡의 우리 현대사 중심축인 제주4·3을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로 삼길 기대한다.

제주4·3 사건은 단순한 제주만의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자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역사란 이유에서다.


제주4·3으로 인한 아픔과, 이를 극복한 진상규명운동의 과정을 증언하는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도 필요하다. 세계인에게 4·3을 제대로 알리는 대중화 방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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