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생활체육

수필 /기네스북에 오를 일, 저작권료 1원

4차산업행정뉴스 기자 입력 2021.11.29 05:08 수정 2021.11.29 05:17

김병래 수인 수필가


                             김병래 시인, 수필가

 

 

기네스북에 오를 일
김 병 래

우리나라에서 처음 음악저작권이 생긴 것은 1957년 이었고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생기고서부터 라고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일부 관계자들 외에는 그렇게 관심도 없었고 크게 기여하지도 못해 존재 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것이 연륜이 깊어지면서 관심이 많아지고 가수는 물론 작곡가 작사가들의 실적에 따라 수입과 직결되는 가교가 된 것으로 안다.

한번 노래가 만들어져 히트가 되면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고 본인이 사망해도 70년 동안 돈을 받을 수 있다 하니 얼마나 좋고 좋은 제도이겠는가.

현재 가수나 작곡가 중에는 연평균 8억 원에서 13억 원의 저작권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방탄소년단이나 아이 돌 같이 직접 작사 작곡하는 그룹들은 신흥 부자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작사가 중 에도 1년에 7억 원 이상 수입을 올리고 있는 작사가가 있는데 이 분은 여성으로 직장에 다니다 우연히 작곡가를 만나 작곡가의 권유로 작사를 한 것이 히트가 되기 시작해 한 달 수입이 직장의 월급보다 월등히 많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작사가로 전업해 약420여곡의 가사를 써 거기서 올라오는 수입이 상상외로 엄청나다는 것이다.

실은 나도 1969년에 시인이 되고자 열심히 습작을 학고 있을 무렵 어느 작곡가를 만나 그분의 권유로 몇 곡의 노래 말을 쓴 일이 있었다.

초롱불, 이별의 연가, 싸리 골 추억, 사랑을 말자해도, 꽃 사랑 등으로 모두 1970년도에 작곡가에 의해 작곡이 되어 가수들이 노래를 불러 음반으로 나와 그 중 싸리 골 추억과 초롱불은 방송국에서 한때 음악프로그램에 소개 되어 전파를 타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작사가 협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작사료를 받는지도 몰랐으며 그저 내 노래 말이 작곡이 되어 가수가 노래를 불러 음반으로 나온다는 점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워 일체의 대가는 받지도 않았으며 작곡가도 아예 이점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 말이 없었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세상이 무척 어둑하고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아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은 그냥 지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한 가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그 당시 초롱불의 가사가 서정적이고 옛날 우리 것을 그리는 뜻이 담겨있어 좋았다는 평을 벋은 일이 있었었는데 지금도 이 가사를 보노라면 그 시절 상기됐었던 내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불러보는 마음의 동반자
흩어진 추억 길을 다시 또 한 번
옛날처럼 아롱지는 임의 자욱이
세월 흐른 오늘에 더 그려지네

언제나 그려지는 추억의 동반자
정다운 싸리문을 다시 또 한 번
그날처럼 물결치는 임의 미소가
세월지난 오늘에 더 그려지네 (초롱불전문)

이런 일이 있은 그 이후에는 바쁜 직장일로 글쓰기를 접었는가하면 작곡가와도 자연 소원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작년(2020년) 초여름 우연히 유튜브를 보는 순간 50여 년 전에 내가 작사하고 이미 고인이 된 차중광이 부른 초롱불이 흘러 나왔다. 나는 수 십 년 만에 만난 친구인양 반가움을 가누지 못했고 눈과 귀를 의심하며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수소문 끝에 서울에 있는 작곡가를 찾아 새롭게 반가운 마음으로 통화를 하며 노래 초롱불에 대한 추억어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 과정에서 작곡가는 나에게 요즘에는 저작권료가 체계화 되어 어렵지 않게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으니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작사가로 등록을 해 용돈이라도 벌어 쓰라고 했다.


때 늦은 감도 있고 별로 신통치 않은 생각이 들어 관심 없이 듣다가 돈벌이가 된다는 말에 귀가 번쩍해 등록을 하기로 결심을 했었다.

작곡가가 알려주는 대로 절차를 밟아 등록했으나 등록비와 제반 서류 등을 갖추기가 그다지 녹녹하지는 않았다.

어줍게 등록을 마친 나로서는 새로 직장을 구한 것처럼 마음 한편에 고무풍선이 가을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 후 작년(2020)말 한국음악작권협회에서 내 통장에다 저작권료를 넣어 줬다는 문자가 날라 왔다. 순간 나도 이제 저작권료를 받아 생활에 보탬이 되고 용돈도 넉넉하게 쓰고 아내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겠다는 기대를 갖고 통장을 확인한 결과 23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 마냥 쓴 웃음만 짓고 있었다.

작곡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작곡가 왈 노래는 방송. 노래방. 유튜브 등에서 많이 들어야 수입이 있기에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첫 술에 배가 부르지 않다는 말처럼 그래도 앞을 내다보고 작은 불씨 같은 희망을 져 버리지 않고 꾸준히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추스르고 추슬러야만 햇다.

그러던 중 금년(2021) 3월 다시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저작권료를 보내줬다는 연락을 받고 통장을 확인한 결과 나는 기절하고도 초풍을 할 번했다. 통장에 저작권료로 1원이 입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나고 땅을 보니 눈에서 경련이 일고 있었다.

한국음악저적권협회 담당자가 말하기를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대중가요 시장도 불황이고 사용료가 들어와도 가수 작곡자 작사가에게 분할해서 지급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1원의 어이없는 금액이 배당됐다는 묘한 답변을 해 줬다.

언젠가 지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작사비로 1원을 받았다고 목에 힘을 주고 큰 소리로 자랑을 했더니 모두가 술잔이 엎어지도록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도 너털웃음을 웃은 일이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서 1원이란 화폐단위는 아무 이용가치 없는 돈이 아닌가 한다. 일본에서는 문방구나 잡화상 같은데서 1원짜리 물건이 있으나 우리나라는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1원짜리 물건을 파는 곳은 없고 구경할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가 받은 작사료 1원은 또 하나의 의미가 크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코로나가 사멸되어 사회 전반이 활기를 띠고 가요계에도 별빛 같은 바람이 불면 나에게도 저작권료가 백 단위 이상으로 들어오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새삼 가져보고 그날이 꼭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로 했다.

난생처음 받은 1원의 저작권료 이것은 기네스북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다,

 

김병래
전 KBS부산방송아나운서부장
시인. 수필가. 문예시대 작가상
저서:아나운서와 술(수필집). 내가 사랑하는 세 여인(시집)외 다수

 



저작권자 4차산업행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